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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요나'를 택했는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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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요나'를 택했는가

승리의핑크호랑이 2014. 7. 3. 18:36

기존 타 교단에서 세례받은 새신자로써, 지난 일요일 나는 성공회로의 전입식과 함께 세례명(성공회식 표현으로는 신명)을 하나 택해야 했다. 고심 끝에 고른 것은 구약 소예언서에 등장하는 "요나"였다. 그 이유에 대해 기록해 둔다.

나는 왜 "요나"를 택했는가.

1. 설득하시는 하느님

요나서는 그 주제보다도 물고기 이야기로 더 유명하다. 문학성을 가진 만큼 초자연적이고 비현실적인 이 일화에서 나는 역설적으로 설득하는 하느님을 발견한다. 크고 무서워 보이지만 실은 불필요하게 번거롭고 다소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이 삽화는 신화적 요소를 풀어볼 때, 내게 불순종에 대한 형벌보다는 요나 내면을 향한 끈질긴 설득으로 다가온다. 이는 박넝쿨 이야기에서 더 명백하다. 나는 요나를, 현실(1장에서 나타는 선한 이방인 등)과 마주하며 자신이 기존에 가졌던 생각과 대치되는 하느님의 꿈에 설득당하는 과정으로 읽게 된다. 어쩌면 이 난리통은, 자신이 안주하던 낡은 신앙(다르싯, 배 밑창, 아주까리 그늘 등)이 현실 속 하느님의 지향과 충돌하는 모습을 해학적으로 그린 것이 아닐까?

2.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

이는 요나서의 핵심 주제이니, 굳이 더 설명이 필요할까 싶다.

3. 사회 정의

요나의 설교와 니느웨 사람들의 반응은 짧게 기술되어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럼에도 요나 저자는 동시대 예언자인 아모스의 사회 정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3,8) 요나서에서 죄와 회개는 결코 사적인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랑에 기반하면서도, 요나는 불의와 폭력에 대한 회개를 촉구한다.


이와 같은 이유는 둘째치고서라도, 요나처럼 코믹한 장품은 성서에 유일무이하지 않은가? 어쨌든 이런 요나서의 함의를 감안할 때, 이씨 성을 가진 모 목사가 이 이름을 쓰는 건 썩 유쾌하지 않은 일이지만, 남의 이름까지 내가 간섭할 수야 없으니 뭐...